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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로 살기/성지순례

[온라인 성지순례] 3. 유섬이묘부터 대산성당 그리고 복자 정찬문 안또니오묘까지 마산교구 순례하기

by 풀꽃향기 2020.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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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코로나가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지만, 이번달 순례길을 거를수가 없지요.

오늘은 마산교구의 성지 5곳을 순례하기 위해 이른 아침 길을 떠났습니다.

깜깜한 밤 버스에 올라 묵주기도를 바치며 3시간을 달려 첫 순례지인 순교자의 딸 유섬이 묘에 도착했습니다.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의 딸 유섬이의 묘소입니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할 당시 9살이었던 그녀는 거제도 관비로 유배되었습니다.

거제부사는 그녀를 거제읍 한 노파의 수양따로 보냈지요.

유섬이는 품위가 넘쳐서 관노 무리가 감히 관비로 대하지 못하였습니다.

대략 14세때, 평생 동정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보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녀는 나이 16, 17세때에 따로 작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바느질만 하며 지냈습니다.

 

 

 

그녀는 40여세가 지난 후 예사 사람처럼 살았습니다.

고을 사람들이 그 정절을 알고, '유처녀'라고 불렀습니다.

그녀가 동정을 지킨 것은 오빠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의 삶을 본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1863년 7월 유섬이는 71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거제부사 하겸락은 그녀를 위해 자신이 장례비용을 부담하고 내간리 송곡마을 뒤 현 위치에 안장하였습니다.

부사가 유배 온 일개 노비의 생애를 자기 문집에 기록하고, 제문까지 지은것은 참으로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유섬이의 삶이 고결하였고, 고을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비록 순교자는 아니었지만, 순교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딸로 하느님을 따르는 굳건한 자세를 보여준 유섬이...

오늘날 우리가 분명 배워야할 마음가짐을 지닌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입니다.

윤봉문 요셉 복자의 가족이 거제도에 정착한 것은 1868년경입니다. 병인박해 중에 윤사우 스타니슬라오가 양산 '대처'를 거쳐 이곳 진목성에 와 전교 활동을 폄으로써 활발하게 포교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윤봉문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로 거제의 사도로서 형 경문과 함께 교회 회장직을 맡아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에도 열심이었습니다.

1888년2월7일(음) 옥포에서 체포된 윤봉문은 거제 부사 박병용의 호출을 받고

거제 관아로 끌려가 태형을 받고 투옥되었습니다.

포졸들은 배교시키려고 심한 문초와 고문을 가했지만, 윤봉문은 믿음으로 견디다

진주로 옮겨져 교살당해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나이 37세였습니다.

윤봉문은 가족으로는 부인 진 아녜스와 아들 학송 루카(당시7세), 딸 송악 가타리나(당시 2세)가 있었습니다.

윤봉문의 시신은 진주 장재리 공소의 교우들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가매장하였습니다.

 

 

 

"대나무가 울창한 숲에 자리잡은 십자가의 길을 우리는 가족과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로 바쳤습니다."

 

 

그 후 10년 뒤인 1898년경 당시 옥포 본당 복사로 있던 성 바오로가 윤봉문의 유해를 거제도로 모셔와서 옥포 족박골에 안장하였다가 2013년 4월20일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습니다.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도착한 순례지는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입니다.

박대식 빅토리노 복자는 1811년 김해시 진례면 시예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정은 부유했으며, 언제부터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부친 박민혁과 형제들은(대붕, 대흥,대식)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병인박해를 겪게 됩니다.

병인박해 때는 가족 모두가 피신하여 잡히지 않았으나, 1868년 무진박해 때 박대식은 조카인 박수연과 함께 붙잡혔습니다. 박대식은 경상 감영에서 연일 배교를 강요당하며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868년 8월27일(음) 조카 박수연과 함께 참수 치명하였습니다. 당시 박수연은 예비 신자였습니다.

박대식의 가족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선산에 모시려 하였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의 외교인들이 반대하자 하는 수없이 그의 세 아들(종립, 종반, 종철)과 형제들이 마을 뒷산인 챗골 유씨 문중 산에 평장하였습니다.

그 후 120년이 지난 1956년 봄에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하여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습니다.

이때 순교자의 세례명이 명확하지 않아 세례명을 임시로 '노렌죠'(라우렌시오0라고 명명했으나

2001년에 순교자의 세례명이 빅토리노임을 밝혀내었습니다.

 

 

 

 

다음 순례지는 대산성당(복자 구한선 타대오 성지)입니다.

[치명일기]에 따르면 구한선 타대오(1844-1866)는 함안 미나리골(현재 함안군 대산면 평기 마을) 출신입니다. 

신심이 돈독하고 믿음에 충실해 병인박해(1866년) 직전 리델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까지 가서 전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리델 신부는 충청도로 떠나고 구한선은 진주 인근에서 지내다 붙잡혔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며칠 동안 혹독한 문초를 받았습니다.

심한 매질과 고문으로 성한 곳이 별로 없었습니다.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게되자 관에서는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본가도 돌아온 뒤 칠일만에 장독으로 죽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셋이었습니다.

구한선의 묘는 1959년에야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교우들은 대산면 하기리 신대 마을 신씨 묘역안에 있던 묘소를 참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순교자의 묘소가 외교인 묘역안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긴 교우들은 1976년 9월 묘소를 평림리 가등산으로 이장하였습니다.

 

 

 

2014년 8월 구한선이 시복된 뒤, 성지 주변의 환경 변화와 순례자들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2016년 10월 복자의 유해를 대산성당에 모시고 새롭게 성지를 조성하였습니다.

새 성지에서는 무덤경당(순교자 묘소)과 야외 기념 제단(유해일부 안치)에서 기도하고,

안내 쉼터에서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마지막으로 방문한 순례지는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입니다.

정찬문 안토니오 복자는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신자였던 아내의 권면으로 입교 영세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정찬문은 포졸에게 잡혀 진주 감옥에 갇혔습니다. 여러 번 심한 문초와 고문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가 옥에 갇혀있는 동안 아기를 등에 업고 주먹밥을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는

그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쓰기까지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결국 이듬해인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20일), 정찬문은 매를 많이 맞은 끝에

진주 옥에서 그날 밤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45세였습니다.

 

 

 

죽은 뒤 그의 일가들이 정찬문의 시신을 모셔왔는데, 머리를 가져오지 못한 채 하체만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어찌하여 머리를 가져오지 못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순교자의 무덤에 머리가 없다는 사실이

신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면서 무두묘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46년에 문산 성당에 부임한 서정도 벨라도 신부는 정찬문과 무두묘 이야기를 듣고

무덤을 찾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48년3월29일 신자들과 정씨 문중 사람들의 노력으로 무덤을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성지순례한 마산교구는 복자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정리되지 않은 묘들도 있어 마음이 아팠지만, 

어찌 겉으로 보이는 묘가 중요할까요

그래도 신앙의 후손들의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고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작은 노력이 보태져야 할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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