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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로 살기/성지순례

[온라인 성지순례] 5. 서울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시교정, 가회동성당,경기 감영 터까지

by 풀꽃향기 2020.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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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교구, 모든성당에서 미사가 중지되었습니다.

사순을 시작하는 재의수요일도, 어느 한 젊은 사제의 선종에도 신자들이 함께 할 수 없어 가슴이 아프네요

그래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말씀묵상과 묵주기도로 이 사태가 빠르게 정상화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사순을 시작하면서 이런 상황에 놓이게 한것도 어쩌면 하느님의 뜻이 아닐까... 얕은 생각에 잠겨봅니다.

 

 

온라인 성지순례의 첫 성지는 가톨릭 대학교 성신교정입니다.

 

가톨릭 대학교 성신 교정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토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유해는 오늘도 그를 본받아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가톨릭 대학교 신학 대학의 효시는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과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시키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중 김대건과 최양업만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결국 순교하였습니다.

 

그 후 1855년 배론에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신학 교육을 시작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성요셉 신학당은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1885년 강원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서 현 가톨릭 신학 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엶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국내 신학교의 설립을 보게되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1887년에 신학교는 서울 용산 함벽정(현 원효로 4가)으로 이전하였습니다.

1942년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가 광복된 1945년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개칭하여서 다시 설립되었고, 그 후 성신 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개인은 동,하계 방학 중 방문이 가능합니다. (1-2월, 7-8월)

단체는 공문을 통해서 접수 예약 후 방문가능합니다.

 

두번째 온라인 성지순례지는 서울교구의 가회동 성당입니다.

 

가회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조선에 밀입국하여서 1795년 4월5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서(한국 땅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성당입니다.

주문모 신부는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할 때까지 북촌에 있던 강완숙 골룸바의 집에 머물면서 미사와 고해성사를 집전하며 사목 활동을 하였습니다. 

가회동은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 거점으로서 한국 초기 교회의 신앙 중심지였습니다. 

 

1955년 8월9일, 병인박해를 일으켰던 흥선 대원군이 손자이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천왕 이강이 가회동 성당의 관할 구역인 안국동 별궁에서 임종1주일 전에 세례 받기를 원하여, 당시 보좌 신부였던 박병윤 신부에게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피로 물들인 점을 자손의 한 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고 입교 동기를 밝혔습니다. 의친왕 이강이 죽기 이틀전인 15일에는 의친왕비 김숙 여사도 가회동 성당에서 '마리아'란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역사적인 사실은 순교 신앙의 승리를 입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회동 성당은 북촌에 자리잡아 한옥의 아름다운 미를 뽐내고 있습니다.

주일은 오전 6시와 11시, 오후 6시에 미사가 있으며

월요일은 오전 6시

화,목은 오후 7시

수,금은 오전 10시 

토요일은 오후6시(주일미사)에 미사를 봉헌할 수 있습니다.

 

매 미사 20분전에 고해성사 가능합니다.

 

세번째 온라인 성지순례지는 경기 감영 터입니다.

 

박해로 숨어서 천주를 믿어야 했음에도, 점점 확산되어 가던 경기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잡혀온 경지지역의 신자들은 한성 서대문 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서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특히 가난하고 몸이 부실하며 배움도 부족했던 조용삼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에게 신앙을 배우며 따르다가 체포되어 11개월동안 옥에 갇히게 됩니다.

옥중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았습니다. 1801년 2월에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았는데, 약해진 몸은 더 이상 형벌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다시 옥에 갇힌지 며칠 지난 3월27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에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으 조용삼 베드로를 시복하였습니다.

 

2년전 겨울 저는 서울순례길을 걸으며 경기 감영 터를 순례하였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의 한 가운데 정말 자세히 찾아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경기 감영 터...

이 곳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하느님의 곁으로 기쁘게 떠난것을 위안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위치는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 9입니다. 적십자 병원 정문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출구를 찾으시면 되고, 성지순례 확인도장은 종로 성당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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